ONE PIECE/텍스트

[에이사보] 불안

77_칠칠 2018. 10. 27. 16:49

눈을 감았다. 컴컴한 미래밖에 보이지 않았다. 냉담한 현실이 생생하게 와 닿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구나. 고요하다 못해 잡음조차 들리지 않는 공허함에 몸이 무거워졌다. 아니, 몸이 가벼워 진 걸지도 모른다. , 이제 와서 그런 게 중요한가. 마지막으로 누군가 생각난다면, 사보, 네 얼굴이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가 너무도 보고 싶어. 눈을 다시 떴을 때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

 

, ! 그만 좀 자고 일어나, 이 자식아!”

 

 눈을 떴다. 그 동그란 눈이 저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엷은 금발의 머리칼이 바람에 일렁였다. 색소 옅은 눈썹 또한 그에 따라 움찔거렸다. 언제까지 자고 있을 셈이야, 점심시간이 지난 지 오래 인 거 몰라? 무거운 눈꺼풀을 부비며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쭉 피며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지금이 몇 시지? 벌써 한 시가 다 되간다. 이미 밥을 다 먹고 왔는지 남정네들 밖에 없는 반이 시끄러웠다. 오늘 급식 맛있지 않았냐? 그러게, 평소 같았으면 고기도 조금 줬을 텐데 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거슬렸는지 사보가 내 양 뺨을 붙들었다. 잠은 다 달아났냐? 너 때문에 난 아직 밥도 못 먹고 있다고, 바보야. 미안, 미안.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내밀었다. 빨리 일어나, 가서 밥 먹고 오자. 나 배고프니까. 큰 눈이 포물선을 그리며 기분 좋은 웃음을 내보였다. 헤실 웃으며 그의 조금 작은 손을 쥐고 일어났다. 급식실까지 경주다! 내밀었던 손을 갑자기 쏙 내빼더니 사보가 교실을 박차고 나갔다. , , 야 잠깐 쩨쩨하게!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몸이 달려나갔다. 이 새끼가 먼저 내빼? 그는 이미 저 먼 발치서 캭캭대며 달려나가고 있었다. 잡히면 넌 가만 안 둬!

 

***

 

이상한 꿈을 꿨어.”

?”

근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

 

암흑에 빠져 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나. 나는 책상에 턱을 괴고 그렇게 말했다. 근데 뭐라고 할까, 되게 오래 되고, 그리운 꿈이었던 것 같아. 그건 무슨 의미야? 사과 주스 빨대를 입에 문 사보가 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게. 이유라면 저가 제일 찾고 싶은 기분이었다. 분명, 고통스럽고 절망적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정말 그랬던가 마저도 의문점이 들기 시작했다. 사보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보고싶었다 따위만 생각했었다. 거기서 나는 너를 찾았는데, 네가 없었어. 그래서 불안했던 것 같아. 나름 진지한 기분이었다. 네가 없는 나 라니, 누군가 들으면 비웃을 듯한 문장은 정말 그만큼의 영향력을 가졌다.

 우리는 서로 옆집에 거주하고 있었고, 집 밖만 나오면 마주칠 수 있었던 사이였기에 자주 만나서 놀곤 했다. 성격도 잘 맞았다. 어린 사보는 개구지고 활발했지만 그만큼 야무지고 똑똑했다. 철부지에 말썽꾸러기 이기만 했던 나를 가끔 타박하기도, 가끔은 지지해 주기도 하며 구제불능인 저를 사람 답게 만든 장본인 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보의 집안은 엄격하여 속박을 싫어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그에게는 커다란 장벽과도 같아, 종종 그들 로부터 우리 집으로 도망쳐 오기도 하였다. 서로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고, 자신의 세계에 서로가 들어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없는 나는 이루어질 수 없다. 사보, 난 네가 없으면 안돼. 애꿎은 빈 사과 주스 빨대만 쪽쪽 빨아대던 사보가 저를 빤히 바라보다 크게 웃어 댔다. 웃겨?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데 그게 웃겨? 목젖 보여라 깔깔대던 사보가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훔치고 투명하고 말간 미소를 지었다.

 

, 내가 여기 있는데 누가 없다고? 이 형님은 너의 곁을 절대 안 떠날 거에요~.”

······.”

걱정돼? 넌 내가 네 옆에 있다는 게 그렇게 안 믿겨?”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네가 없는 나는 불완전 하다 생각했다. 네가 없으면, 난 아무런 존재도 못 될 것만 같다고. 너는 자유로운 사람이니 내가 구속해선 안 되지만, 네가 나의 세계에서 발을 벗어난다는 건 상상하기 싫다. 네가 네 옆에 있는 게 안 믿기는 건 아닌데, 종종 그런 생각이 들거든. 네가 갑자기 내 곁을 떠난다면, 그런다면 나는 어떡하지, 따위의 생각을. 네 교복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손가락을 찾아 팔을 더듬고 내려갔다. 보드란 손등이 만져졌다. 일순 올라온 불안감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네가 영원히 나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 낯부끄러운 말을 내뱉었다. 차마 맨 얼굴을 바라보며 말 할 용기는 없어 고개를 숙였다. 좀 전 마냥 또 그렇게 깔깔대며 웃어 댈 모습이 선했다. 말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반 아이들의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만이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아무런 반응 없는 사보가 어쩐지 의아해서 고개를 슬 들었다.

, 가벼운 마찰음을 내고 그의 입술이 내 이마에서 떨어졌다.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사보는 재미있는 광경을 보듯 입꼬리를 귀에 가까이 걸었다. , 지금 네 얼굴 표정 진짜 장난 아냐. 같은 사내새끼 에게 이마에 뽀뽀를 받았다는 것보다, 이 광경을 다른 녀석들이 봤을까 하는 걱정부터 들었다. 때마침 재수 없게도 종이 쳤다. 난잡하게 울리는 노랫소리가 마치 내 마음과도 같았다. , 종쳤다. 나 자리로 돌아간다. 태연한 얼굴로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손으로 만지작거리고는 그 말 만을 남기고 사보는 내 책상에 사과주스 곽을 버리고 제 앞자리로 돌아갔다. 내 얼굴 또한 사과 껍질 마냥 새빨개진 것 같았다. 자리를 찾아 분주해 있는 아이들 사이로 고함을 질렀다. ! 사보!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저를 쳐다봤다. 사보만이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저 조그마한 뒤통수 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 태연한 녀석도 저처럼 얼굴이 벌개졌을까. 수학 선생님이 들어올 때까지 저 노란 것만 바라봤다. 고개를 돌릴 생각 않는 저 뒤통수가 괘씸하다고 느껴졌다. 젠장, 젠장! 입술의 감촉이 여전히 제 이마에 남아 있는 듯했다. 이마 한가운데서부터 열이 퍼지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그대로 책상에 꼬라 박았다. 나쁜 꿈을 꿀 것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조금 전 까지 있었던 일만을 생각하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