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질러 버렸다······.”
그 술기운이 문제다 문제. 얼마나 마셔댄건지, 난생 처음 보는, 정확히 말하자면 두 번째로 보는 이 낯선 방의 천장을 올려보니 머리가 띵해온다. 엷은 신음을 흘리며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목 언저리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내리며 여간 문제가 아니라고 다시금 되새겼다. 어젯밤 그가 술에 절어 읊조리던 이름이 갑작스레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내가 그에게 이름을 알려줬던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숨겨진 연인의 이름이 운 나쁘게 동명이기라도 했던 걸까. 아아, 이럴 순 없다······. ‘본래’의 몸도 아니고, ‘여성’의 몸으로 라니. 얇은 이불이 중력에 의해 사르륵 떨어지며 상체를 가리고 있던 실오라기가 벗겨져 맨살이 드러났다. 몸 곳곳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화상자국 사이의 뽀얀 살 곳곳에는 언재 새겨졌는지 짐작이 가는 붉은 반점과 잇자국이 남아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길을 슬 옆으로 틀었다. 난생 처음 보는 남자와 섹스라니. 아니, 면식은 있었다. 수배지를 통해 본 것뿐이지만. 단단한 근육이 새겨져 있는 등 한 가운데에는 위대한 항로의 바다를 재패하는 그 흰수염 해적단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으며, 반곱슬 끼가 있는 흑발. 의심할 여지없이 이 남자는 그다. 흰수염 해적단 2번대 대장, 포트거스 D. 에이스다.
딱히 해적에게 원한이 있거나, 그들과 대적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가 해적이라는 것은 그다지 큰 충격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어쩌다 이 위대한 항로에서, 우연찮게 정보 수집이라는 명목 아래 잠시 은복하고 있던 이 섬에서, 단독 행동을 하고 있는 이 남자와 선술집에서 마주쳐서는, 아이러니 하게도 눈이 맞아 야심한 밤 이 모텔로 단 둘이 들어선 이후 같은 아침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완코브의 능력으로 성반전이 된 상태로. 콘돔은 썼던가. 어차피 후에 다시 이완코브를 만나 본래의 몸으로 돌아오면 뭐 상관은 없나 라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어디 가냐······, 일어나지 말라고 젠장······.”
“하아?”
여전히 자고 있는 줄만 알았던 남자가 몸을 틀어 손을 뻗는다. 뻗은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더니 그대로 나를 눕혀 제 품 안에 가둔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젠장, 난 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단 말이다. 품에서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써봤으나 그의 악력에서 맨손으로 벗어나기란 어려웠다. 그렇다고 무작정 패기를 쓸 순 없는데. 망할, 그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팔을 풀어달라는 의미로 몇 번 뒤척였다. 그러나 무용지물인 듯 그의 팔은 오히려 나를 더 옥죄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숨김없이 드러난 맨살에 와 닿는다. 이어서 그는 콧잔등을 목 언저리에 얹히고는 낮은 음성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기분은 좋았어? 나, 잘했냐?”
“─겨우 원나잇 상대에게 별 걸 다 물어보는군 그래, 불주먹 에이스.”
“아,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가?”
“모를 수가 없지. 너에 대한 건 이 나라 국민도 다 알고 있을 걸?”
“그런 가······. 내가 벌써 그렇게 유명해 졌구나. 뭐, 상관없지.”
“현상금이 늘어나는 게 그렇게 좋아?”
“해적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명예라고, 높은 현상금 이란 건 말이야.”
“그리고 목이 달아날 확률도 더 높아지겠지. 틀려?”
“하하, 입이 꽤나 험하네, 아가씨.”
투박한 손이 봉긋이 솟은 가슴을 더듬어 올라왔다. 말없이 손등을 찰싹 때리자 들리지 않는 깨갱 소리와 함께 그 큰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제 몸에서 저를 놔줄 생각은 없나보다. 뒷목에 짧은 입맞춤을 하고는 엷은 살을 지분거린다. 아침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쾌감이 싫지는 않았으나,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죄책감이 계속 뒤따를 따름이었다. 뭐 상관없나. 어차어피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없다.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뒤숭숭한 일의 흉모만 파악하면 될 뿐이다. 그리고 그 일은 그다지 급한 게 아니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여성의 몸에도 적응했고, 그 몸으로 평범한 일상을 하는 것에 문제 따윈 없었으며, 성행위를 통해 얻는 쾌감 또한 잠깐의 피로를 푸는 유흥이자 곧 취미가 되었다. 어쩔 수 없지, 될 대로 되라는 의미로 제 몸을 돌려 누웠다. 갑작스런 행위에 그 남자는 당황한 듯하였으나, 이내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의 검은 동공은 곧 닥칠 행위를 기대하기라도 한 듯 불타올랐다. 지금 보니, 살짝 달아오른 듯 보이는 뺨에 박힌 주근깨도 나름 매력적으로 보이는구나. 양 뺨을 잡고 입을 맞추자 얼마 가지 않아 혀가 얽힌다. 이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그의 손이 허리를 타고 엉덩이를 움켜쥔다. 허벅지 위로 느껴지는 덩어리감에 한쪽 다리를 슬 올려 그의 골반을 감싼다. 잡아먹히는 것만 같은 키스가 끝나자 그가 몸을 비틀어 내 위에 올라탄다. 어젯밤 정사의 흔적이 여전히 허벅지 사이에 남아있었다. 내 몸 위에 그려진 흉터를 두꺼운 손가락으로 상냥하게 훑어 내리더니, 오른쪽 눈 위의 화상자국에 입을 맞춘다. 마치 연인인 마냥 부드럽게 워밍업을 시작하는 게 왠지 우스워 피식 웃음을 흘겼다. 겨우 어제 만난 것 같은데 마치 오래된 연인 같은 꼴을 하고 있잖아, 우리. 그 말을 듣던 그가 가만 나를 쳐다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러게. 하지만 왠지 네게선, 오랜 그리움의 냄새가 나는 것 같거든.”
다시 입을 맞췄다. 그 문장의 의미를 모른 채 우리는 다시금 몸을 섞었다. 오래 된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날, 그는 열 번의 정사를 내뱉었고, 내 몸에는 열일곱 개의 붉은 자욱이 남았다.
***
그와의 헤어짐은 마치 기러기 부부의 헤어짐과도 같았다. 모텔에서 나와 몇 걸음은 그와 함께 하였다. 그 사이의 대화는 마치 천천히 부상하는 비눗방울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이름 있는 어느 젊은 해적의 모험담일 뿐이었는데, 왜 이 가슴은 그리도 간지러운가. 타인에게선 느껴지지 않는 가족과도 같은 포근함에 이유 모를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너와의 대화는 가슴 한 칸이 어쩐지 가렵다 말하니 그는 넉살 좋게 웃으며 낫게 해줄까 라는 같잖은 농담과 함께 내 가슴을 움켜잡았다. 주물럭거리는 그의 손길은 나쁘지 않았지만 괘씸하다는 생각에 그의 명치를 가볍게 걷어찼다. 장난기 어린 신음 소리와 함께 그렇게 헤어졌다. 이 험난한 위대한 바다의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 라며. 다시 만나면 오늘과 같은 섹스를 반복하자는 시답잖은 약속을 하고는. 돌아서려는 내 팔을 잡아 이마에 키스를 해 주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마를 매만지며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순백한 어린 아이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에 화답하듯 나 또한 그에게 눈웃음을 지어줬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마지막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정상결전, 에이스, 불 주먹, 사망, 루피, D, 골드 로저, 해적』
머리를 울리는 고통이 정신을 점령한다. 커다란 악몽이 지배하는 이성은 이미 무릎을 꿇은 채 제 손을 떠난 지 오래다. 갈 곳 잃은 동공은 허공을 주시할 뿐이었다. 눈이 빠질 것만 같은 충격에도 가당찮은 채 쉼 없이 새어나오는 눈물이 시야를 흐트러뜨렸다. 여태껏 드러나지 않았던 바다 한 구석의 심해가 갑자기 수면 위로 부상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내 머릿속에서 당연하다는 듯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처참하게 부서진 빙산은 조각 하나하나 흘러 바다로 스며들고, 수중으로부터 드러나지 않았던 빙산의 나머지 부분은 흩어진 잔해를 대신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다. 나의 과거는 그렇게 조각조각 면전을 드러냈다. 고아 왕국, 그레이 터미널과 에이스, 루피, 블루잼 해적단, 국왕군과 쓰레기 같은 자신의 아버지, 불에 타 지워진 그레이 터미널의 역사와 바다로 나서는 이야기, 편지, 그리고 가라앉는 자신의 첫 번째 해적선, 그와 함께 했던 의식을 잃어가는 어린 몸뚱어리가 지금, 고작 신문1면의 대형 기사를 통해 수면 위로 올라온 참이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잠든 사이 꿈을 꿨다. 오랜 추억이 그 시간 사이에서 필름마냥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잠깐이나마 누렸던 어린 시절의 자유, 숲 속을 뛰어다니던 나와 벗, 어른을 맛보는 기분의 서로 맞대었던 작은 술잔, 형제의 유대와 가족으로 있을 수 있던 시간의 따스함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그 시간만이 반복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비참했다. 나는 그들과 헤어졌고,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거닐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죽은 존재로 남아있었고, 시간이 지나 어느 바다에서 다시 만나자는 것 또한 나만이 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나 혼자만 그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지금 와서야 그들을 마주할 때가 되었는데 그조차 온전히 할 수 없었다. 살아남은 이에게 나의 생사는 희소식이겠지만 동시에 비극이 될 것이다. 잠시나마 느꼈던 행복한 꿈을 뒤로하고 식은땀에 젖은 채 오랜 시간 뉘여 있던 몸을 일으켰다. 늦은 시간까지 나를 간호해준 것인지 코알라는 제 옆에 앉은 채로 침대에 기대 엎드려 있었다. 그래도 내 옆에는 이들이 있구나. 그 때, 드래곤 씨가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 죽은 사람이 되어 그들의 추억 속에서 살았겠지. 자신이 있을 곳을 만들어주고, 내게 다시금 자유를 쥐어준 이들은 나의 은사이자 소중한 인연, 새로운 가족이 되어 주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어준 이 혁명군에게 나는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한 이 곳을 떠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내 기억 속에서 떠오른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 것이라고, 그러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다시 만나고 싶구나, 루피. 너의 모습을 보면 나는 비로소 오랜 꿈에서 깨어나겠지.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너를 지켜낼 수 있는 단 한 명뿐인 형이 되고 싶다고.
─그리고 에이스. 에이스, 에이스, 에이, 에······
에이스. 그의 얼굴이 어쩐지 잊혀 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한 루피와는 사뭇 다른, 어른이면서도 어른이 되지 못한 그 때 그 웃음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 왜 이제서 너를 떠올린 걸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 겨우 섹스를 위해서 라는 시답잖은 것 따위가 아니었어야 했다. 어쩜 이리도 지독한 인연인가. 너의 얼굴을 마주하고도 오랜만이라는 말 한번 해주지 못하였다. 그 그리운 살내음을 맡으면서도 눈치 채지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순간의 쾌락만을 좇았던 그 때 그 순간이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너를 처음 만난 선술집에서, 자리에 앉아있던 내게 슬그머니 다가와 같이 한 잔 할까, 라고 말을 건네던 그 목소리에 웃으면서 화답할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네 목을 끌어안았어야 했다. 이제 와서야 후회가 밀물마냥 쓸려 들어온다. 너와 나누었던 그 온기가 사무치도록 그립다.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 있다면, 아이러니 하게도, 그 때 너와 했던 섹스는 내 생애 최고의 섹스였어. 그 날 만큼 격렬한 섹스는 앞으로도 없을 텐데. 여전히 욕정 가득한 생각만 하는 것이 어이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숨길 수 없는 진심이라는 것에 더욱 눈물이 났다. 2년 전의 그 때 그 간지러움이 너를 향한 연모이자 그리움이라는 걸 왜 눈치 채지 못했을까. 열일곱의 나이에 단신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겪었던 그 수많은 경험들이 나를 설레게 했으며, 내가 이루지 못한 꿈들을 네가 대신 이룩해주었다는 본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 어린 시절의 감정을 지금에 깨달았다는 것이 나를 자괴감에 빠져들게 만든다. 후회하기엔 이미 늦어버렸을까. 2년 전 그 마린포드에 내가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따위의 가정법을 읊어봤자 소용없는 이야기일까. 어차피 늦은 이야기라면. 뒤늦게라도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너희를 만나,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에이스, 네게 반드시 전해야 할 말이 있다면,
──너를 좋아해. 어린 시절 자각하지 못했던, 형제애를 넘어서는 간지러웠던 그 감정들의 의미를 지금에야 깨달아서 미안해.
너를 마주했던 그 날, 마지막으로 내게 보여준 그 미소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네가 말했던 그 그리운 냄새에, 너도 그 날 무언가에 끌리듯 나를 안았던 거냐고. 죽은 이가 그것도 여성으로 살아 돌아올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며 나와 몸을 섞었던 것이냐 묻고 싶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무의식중에 우리는 서로를 찾아 헤맸고, 나는 이미 그 날 너의 마음을 확인했으니까.
***
그 술기운이 문제다 문제. 얼마나 마셔댄건지, 난생 처음 보는, 정확히 말하자면 두 번째로 보는 이 낯선 방의 천장을 올려보니 머리가 띵해온다. 엷은 신음을 흘리며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목 언저리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내리며 여간 문제가 아니라고 다시금 되새겼다. 어젯밤 그가 술에 절어 읊조리던 이름이 갑작스레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내가 그에게 이름을 알려줬던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숨겨진 연인의 이름이 운 나쁘게 동명이기라도 했던 걸까.
‘사보, 사보. 젠장. 좋아해, 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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