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게 일던 파도가 금새 잠잠해져선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운 물결을 일으키며 나쁘지 않은 바닷길을 만들어냈다. 조금 전의 영향 때문인지 녹초가 되어 흐물거리는 선원들이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을 보며 하나 둘 선실 내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제법 큰 녀석이 닥쳤으니까 피곤할 만도 하지. 위대한 항로는 방심할 수 없는 넓은 사막과도 같아 나미씨 같은 천재적인 항해사가 없는 이상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건 절대 무리다. 그런 나미씨의 노고를 아는 지 모르는 지, 날이 가는 줄도 모르고 저 돛대에 등을 기대고 잠을 쳐자는 녀석의 꼬라지는 아주 그냥 저 두꺼운 몸뚱아리서 깊은 뿌리를 내렸다. 배가 그리도 흔들렸는데, 등짝에 본드라도 발라뒀나. 덕분에 내가 네 몫까지 도맡아 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이 마리모 자식아. 들리지도 않을 말을 나즈막이 읊조렸다. 보초나 서, 망할 놈아. 시원하게 코를 골며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녀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놈의 고개가 바닥과 인사를 하는 듯 하더니, 이내 바싹 들려 눈을 한 껏 크게 뜨고는 나를 분노의 찬 시선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 뭐하는 짓이냐, 뱅글눈썹 자식아 "
" 하아? 네놈은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모르는거냐? "
" 알 리가 있냐. 해봤자 루피가 사고를 쳤겠지. "
" 아니거든, 멍청아! 우린 지금 나미씨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줄 알아라 마리모자식! "

 네 대갈통에 들어있는 건 장식이냐. 욕지거리를 듣자 발끈한 듯 조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 멱살을 잡았다. 말 다했냐 망할 요리사 자식아. 왜, 뭐, 찔리냐? 피식, 실소를 흘리며 멱살을 잡아올린 녀석의 손을 툭 쳤다. 이거 놓고, 보초나 제대로 서 썩을놈아. 아니면 정말 그대로 얌전히 썩어서 천연기념물이나 되던가. 자유로워진 목덜미를 매만지며 셔츠 카라를 단정하게 정리했다. 아직도 분노가 가시질 않는지 썩은 눈초리로 저를 바라보는 꼴이 꽤나 웃기더라. 저 머리통 위에 꽃 한 송이가 자라나도 그럴 만 하다며 믿어 이상치 않겠는데. 노란색 꽃잎이 녀석의 머리 움직임에 따라 줄기를 타고 살랑살랑 움직이는 걸 상상하자 웃음이 미친듯이 나온다. 한바탕 깔깔대는데 이녀석, 미치기라도 한 건가 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조로의 얼굴이 보이자 그제서야 웃음을 그치고 몸을 돌렸다. 어쨌든, 잠이나 쳐자지 말고 보초나 똑바로 서. 뚱한 표정이 저를 응시하는 듯 했지만 시선을 흘끗 주기만 하고 급하게 발길을 서둘렀다. 이 멍청이랑 오래 대면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 그 찰나였나, 녀석이 제 팔을 잡아당겼다. 뭐하는 짓이냐 외치기도 전의 놈의 입술이 제 입을 덮쳤다. 호흡을 하기 무섭게 혀로 기습하는 녀석의 머리를 한 대 가격하자 아쉽다는 듯 얼굴을 뒤로 내빼며 입술을 축이는 조로의 모습에는 장난 어린 웃음기가 가득했다. 웃겨? 뭐가 웃겨, 이자식아? 아니, 별로? 지랄하지마 시발놈아!

 서로를 죽이지 않고는 못 배기는 둘의 관계 사이에 승패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된다. 자기만 당하고서는 살 수 없다, 네놈도 똑같이 당해야만 한다 라는 사고가 실제 내 머리속 생각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녀석도 나와 똑같았는지, 알기모를 승리감에 입꼬리를 비죽 올린 것이 분명하다, 이 녀석은. 분명 놈의 머릿속은 초록 잡초가 웅장한 성을 이룬 승부욕으로만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당당하게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젠장! 욕설을 읊조리자 그의 표정이 비웃음으로 크게 일그러지는 듯 했다. 별 것 아닌 일임에도 금방 화가 치밀어올랐다. 저는 지당한 일을 했을 뿐이다, 라는 태연한 태도에 머리 끝까지 열이 뻗힌다. 이 마리모녀석! 성대가 나가라 녀석을 부르짖으며 놈의 몸뚱아리를 뒤로 넘겨뜨렸다. 녀석의 멱살을 잡아올리자 구릿빛 면상이 얼굴 앞에 다시 한 번 훅 들어왔다. 인상을 퍽 쓴 채로 뭐하는 짓이냐며 노려보는 꼴에 그제서야 여태껏 당한 탓에 한껏 달아올랐던 화가 훅 내려가는 기분이 났다. 전세역전이다, 이놈아. 내 말을 알아 들었을지 못 들었을지, 그런 건 별로 상관없다. 어짜피 녀석은 멍청하디 멍청한 망할 바보놈이니까. 입꼬리를 씨익 올려 내가 네 위에 있다는 느낌을 만끽하며, 녀석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구석구석 안 닿는 곳 하나 없이 제 담뱃재 냄새를 죄다 비벼놓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당했다 라는 패배감 때문인지, 아니면 승천할 것 같은 쾌감 때문인지 녀석도 나를 뒤따라 일어나서는 다급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멍청아, 이미 상황 종료다.

 유유자적하게 그 자리를 뜨는 나를 보고 있었을 놈의 표정이 천장 너머로 선하게 그려졌다.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분하다는 듯 제 뒤통수를 그 매서운 눈으로 째려볼 녀석과 면상의 색은 저도 별 다를 바 없었을 테니까. 선상 위에서 열린 문 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밤바람에 한껏 달아올라 가라앉을 기미 하나 보이지 않던 열기가 열기가 일순 후끈하다 미지근해졌다. 여전히 벌겋게 노을진 양 뺨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차가운 공기가 피부와 마찰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그 발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원인은 분명 조로에게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합리화 하기로 하며 눈을 감았다.


'ONE PIECE > 텍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이사보] 조각글 4  (0) 2018.10.17
[에이사보] 조각글 3  (0) 2018.10.16
[에이사보] 조각글 2  (0) 2018.10.11
[에이사보] 조각글 1  (0) 2018.10.10
[조로산] 욕정  (0) 2018.10.03

+ Recent posts